본문 바로가기
썰 방/아티스트 썰 방

팝의 황제, 별이 되다.

by JLMT 2024. 5. 29.

 

2009년 6월 25일. 5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세상을 떠났다.
무대 복귀를 한 달 앞둔 시점, 불과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친구이자 세션 멤버인 드러머 조나단 모펫과 함께 술을 마시며 다가올 런던 공연에서도 파이팅 하자는 대화를 나누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급작스러웠다.

마이클 잭슨의 무대 멤버이자 30년지기 친구였던 드러머 Jonathan Moffett

 

https://www.youtube.com/watch?v=0QiPzUlsBRY

수 많은 음모론이 탄생했다.

 

마약으로 인한 사망?

마이클 잭슨의 사망 원인이 약물로 인한 것이라고 발표가 된 뒤로 세계적으로 마이클 잭슨이 마약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그는 마약을 하지 않았고, 오로지 합법적인 약물만 사용했다. 마이클 잭슨은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사망하였는데, 2009년 당시에는 프로포폴이 전세계적으로 합법적인 약물이었다. 마약성분은 전혀 없는 약물로, 마취유도제로 주로 쓰여왔다. (여담이지만 2011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프로포폴을 마약류로 지정했으며 이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이 프로포폴 중독으로 사망한 것 또한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망 당시 마이클 잭슨의 신체적 건강 상태는 꽤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수많은 팬과 안티들, 그리고 그로인해 발생하는 일상 생활의 어려움과 음모론적인 루머들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개인 주치의를 고용해서 불면증 치료를 받으며 약을 처방받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잭슨의 주치의로 새로 고용된지 얼마 되지 않은 '콘래드 머레이'는 마취 관련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잭슨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수면제와 더불어 프로포폴을 같이 사용하였고, 이 잘못된 처방으로 인한 약물 오남용으로 마이클 잭슨은 사망하게 된다.
 

법정에 출두한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다?

2009년 7월 11일, LA 경찰은 마이클 잭슨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주장을 제기했고, 4일이 지난 15일.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미국 법상 살인으로 결론 지어졌다. 최종 판결은 2급 살인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1급 살인은 고의적 살인이며, 2급 살인은 과실치사에 해당한다. 
 
잭슨 사망당시 주치의이던 콘래드 머레이는 마이클 잭슨이 고집을 피워서 프로포폴을 처방했으며, 그의 자의로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2011년 9월 28일에 시작된 공판에서 잭슨 스스로는 프로포폴을 주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고, 머레이는 과실치사로 인한 징역 4년의 실형을 받고 2년을 복역한 뒤 모범수로 2013년에 석방되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텍사스에서 의료면허가 박탈되고,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주에서의 면허는 정지되었다. 
 

사망 직후

https://www.youtube.com/watch?v=QdvWhOjV-H8

파잭슨의 사망소식을 긴급 속보로 보도하는 CNN 영상

 
잭슨의 사망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자, 역시나 어마어마한 파장이 전 세계를 뒤덮었다.
미국 의회에서는 잭슨을 기리기 위한 국회의원들의 단체 묵념이 있었고, CNN을 비롯한 전세계의 유명 언론들은 일제히 정규 뉴스를 중단하고 긴급 속보 체제에 돌입했다. 또한 사망 소식 이후 빌보드 음반 판매량 순위의 1~5위까지 잭슨의 앨범이 모두 쓸어담았는데, 당시 빌보드 차트에서는 발매 된 지 2년이 지난 앨범은 차트에 집계하지 않아 잭슨의 앨범들이 차트 인을 하지 못하였고 이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거세지자 빌보드는 결국 발매 시기에 상관 없이 성적이 좋다면 빌보드 200차트에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도록 규정을 수정하기까지 했다.
(빌보드 200은 모든 장르의 앨범, EP 판매량 및 스트리밍을 총 집계하는 빌보드의 메인 앨범 차트이다.)
이렇듯 잭슨의 사후 음반 판매는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1980년 존 레논이 사망했을 때의 반응을 압도하였으며,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타임지에서 특집판이 발매되었을 정도로 그 여파가 어마어마했으니, 가히 황제의 서거다운 파급력이었다.

팝의 황제를 보내는 길

2009년 7월 7일. 마이클 잭슨의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에는 약 3만명의 추모객들이 참여하였으며, FOX, BBC, CNN 등의 주요 언론들에서 생중계 되었는데, 미국에서만 3,100만명이 시청하였으며 전 세계적으로 20억명 이상이 본 것으로 추산돼 TV역사상 가장 많은 시청자를 기록한 방송 중 하나로 기록됐다. 
또한 8월 29일에는 마이클 잭슨의 생일을 맞이하여 전 세계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한 Beat It 플래시 몹이 벌어졌으며, 12월 24일에는 FBI가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하였는데,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이 다시 확인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증언되고, 아동 성추행을 비롯한 다른 악성 루머들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팝의 황제는 실추되었던 명예의 상당부분을 회복함과 더불어 10대의 젊은 팬들을 자신의 예술 세계속으로 새로이 수혈하는데에 성공하였다.
 

캘리포니아 '포레스트 론' 묘지에 안치된 마이클 잭슨

이후 발생한 수 많은 해프닝들 

1.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을 당시는 런던 공연을 한달 앞둔 시기였으며, 티켓은 이미 발권이 된 상태였다. 잭슨 사망 후 해당 공연 티켓의 환불이 진행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런던 공연 티켓을 잭슨의 유품으로 여겨 환불하지 않고 소장하였으며 오히려 원래 가격의 10배가 넘는 가격에 경매가 이루어 지기도 했다. 

2.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의 사망 직후에 사실은 잭슨에게 어마어마한 빚이 있었다는 얘기가 돌며 세간을 놀라게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뮤지션 뿐 아니라 사업가이기도 했던 잭슨에게는 당연히 있을 법한 사업자금에 관한 빚이었고, 그 수많은 빚을 다 갚고도 1조 5천억원 이상이(무려 2009년 기준!!!) 잭슨의 재산으로 남을 것이라는 추정과 함께 금새 논란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뒤인 2010년 3월. 잭슨의 모든 빚은 전부 상환되었다.
 
3.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된 후, 인터넷 또한 난리가 났다.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 타임즈는 서버가 폭파되었고, 구글은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검색량이 너무 엄청난 속도로 폭등하는 바람에 디도스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에 관한 검색을 차단해버리는 웃지 못할 해프닝까지 발생하였다. 말 그대로 전세계의 사람들이 다 함께 인터넷을 무너뜨리게 된 셈이다.
 
4. 일부(이긴 하지만 절대 숫자로 보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극성팬들은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믿지 못하고 "마이클 잭슨의 죽음 자체가 일종의 쇼이며, 잭슨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와 세상을 놀래킬 것이다" 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로인해 영문 위키의 마이클 잭슨 항목에서는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 안죽었는지를 가지고 수정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5. 마이클 잭슨의 영지였던 '네버랜드 렌치'에서 2009년 7월 6일, 정체불명의 그림자가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팬들은 "마이클 잭슨의 영혼이 평소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네버랜드 렌치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6ejiZQQRK4

해당 영상의 1분 20초 정도부터 확인할 수 있다.

 
 6. 2009년 이후로 이미 죽은 사람들 중 전세계 최고의 수익을 올리고 있던 마이클 잭슨이 2024년 2월경 본인이 소유한 음반 및 저작권의 절반을 최소 6억달러(약 8천억원)에 판매하기로 하면서 그 정점을 찍었다. 인수자는 소니뮤직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