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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 방/아티스트 썰 방

MZ 테크닉의 최고 존엄 - 유자 왕(Yuja Wang)

by JLMT 2024. 4. 13.

어떤 분야던 역사가 깊어질 수록 전반적인 실력은 상향평준화 되기 마련이며, 특히나 어느정도 주관이 들어갈 수 있는 감성적인 부분 보다 객관적으로 눈에 띄는 테크닉적인 부분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수백년의 역사를 쌓아가며 이미 인류의 한계치에 도달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피지컬 괴물들이 즐비한 클래식 피아노 씬, 그중에서도 젊은 바람을 일으키는 MZ시대의 여성 피아니스트들 중 자타공인 최고의 테크니션은 누구일까.

나의 원픽은 바로 오늘 소개할 중국의 피아니스트, 유자 왕이다.

 

유자 왕(1987.02.10)

 

https://www.youtube.com/watch?v=z-4C6sJZ54g

대타 무대로 떡상, 랩하는 유자왕, 그리고 그녀의 파격적인 드레스코드.

입덕의 순간

내가 처음 유자 왕의 연주를 접하게 된건 당시 27세의 젊은 유자 왕이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공장에서 프로코피에프의 토카타를 연주하는 영상을 통해서였다. 우연히 내게 날아온 그 알고리즘의 은혜는 중국의 피아니스트라고는 랑랑밖에 모르던 무지한 나를 꾸짖는 듯한 강렬한 충격을 선사하였고, 그날로 나는 몇날 몇일, 아니 몇년을 유자 왕의 연주에 빠져 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e0jHkRB0s

나에게 '유자 왕'이라는 신세계를 선사해준 영상.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멍때리면서 보지 않았었나 싶다. 마치 택시 기사님들의 애장품 같은 팔토시를 차고, 뭔가 이상한 털뭉치를 어깨에 두른 모습에, 피아노를 거울 삼아 립스틱을 바르고 엄청난 높이의 킬힐을 신은 그 모습은 그 전까지 내가 가지고있던 일반적인 피아니스트의 모습과는 상이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가 시작되고, 말도 안되는 테크닉으로 프로코피에프를 타건해가는 그 모습에 나는 한 순간에 매료되었다. 어쩌면 그때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걸 크러쉬'라는 것을 내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느껴보았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제일 잘나가

여느 천재들처럼 당연하다시피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재능을 뽐내던 유자왕은, 이전에 소개한 발렌티나 리시차와는 조금 다르게 특별히 막히는 부분 없이 인생에서 어린시절부터 착실하게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15세에 우승을 거머쥔 아스펜 콩쿨을 제외하고는 딱히 수상실적은 없지만, 사실 그녀에게는 그런게 필요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미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전세계 투어를 다니며 잘나가는 피아니스트로 승승장구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살 시절, 피아노를 시작한지 3년정도 되었을 때 연주한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영상이 남아있는데, 그 연주를 보면 피아노를 치는 입장에서는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uDuIenxY1I&list=RDuuDuIenxY1I&start_radio=1

의자에 거의 서서 치는 수준의 어린 꼬맹이인데...

 

다만 유자 왕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한 순간이 있었는데,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전설적인 여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협연 공연에서 아르헤리치가 급작스럽게 연주를 취소하면서 유자왕이 대신 나선 것이었다. 마치 영화나 소설의 한 장면같은 스토리였는데 거기에 반전은 없었고, 유자왕은 당연하다는 듯이 엄청난 기량을 뽐내며 최고의 무대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그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갓 스물이었다.

 

유자 왕의 퍼포먼스

자타공인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연주를 보여준다. 거기에 넘쳐나는 열정과 에너지로 인해 앙코르가 아주 혜자스럽기로 유명한데, 꽤나 많은 연주회에서 거의 1시간에 달하는 앙코르 곡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2022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첫 독주회를 가지며 꽤 여러 곳에서 순회공연을 가졌는데, 모든 공연장에서 10곡이 넘는 앙코르를 연주하였으며, 인천에서는 총 18곡이나 되는 앙코르곡을 연주했다. 일반적으로는 2~3곡 정도를 연주하는게 보통이니 얼마나 팬서비스에 진심인지 알만하다. 

 

젊은 피아니스트여서 그런지, 정통 클래식 뿐 아니라 재즈와 크로스오버 된 작품들도 앙코르로 종종 연주하고는 하는데, 그게 또한 일품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CUjdgdqE90

유자왕이 연주하는 'Tea for Two'

다양한 레파토리를 보유하고 있지만, 주로 고전보다는 낭만이나 그 이후의 현대 음악에 좀 더 강점이 있다고 평가되는 편이며, 본인의 취향도 그러해 보인다. 이는 비슷한 연배의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손열음씨와 비교되는 부분인데, 손열음씨는 모차르트 같은 고전주의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도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모차르트'를 꼽은 적이 있을 정도.

 

아무튼 유자 왕은 이렇게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테크니션이지만, 기계적인 연주와 종종 나오는 날리는 듯한 터치로 인해 표현의 깊이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전에 소개한 발렌티나 리시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험이 쌓이면 쌓일 수록 더욱 원숙해지는 피아노 연주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듣는 이로금 갖게하는 절정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파격

사실 유자왕은 피아노 실력과 더불어 파격적이고도 선정적인 의상으로 인해 많은 이슈가 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많은 공연에서 노출이 상당한 드레스와 더불어 굉장한 높이의 킬힐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무래도 보수적인 분위기의 클래식 씬이다 보니 비판의 목소리도 제법 크다. 이슈 몰이를 위한 섹스 어필이라는 의견까지 있을 정도.

파격적인 복장의 유자 왕.

 

다만 유자 왕 본인이 마흔살까지는 지금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싶다고 밝혔고, 본인과 피아노는 어떤 관계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애증의 관계죠. 아주 문란한'이라는 답변을 하는 등의 언행을 보았을 때, 세간의 시선을 신경쓰기 보다는 자신의 스타일을 그저 당당하게 표현하는 성격이 의상으로도 들어나는 것이지, 이슈 몰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사실 복장이 무어가 중요하겠는가. 그녀의 존재 가치는 그녀가 입은 옷이 아닌 기막힌 그 연주 자체에 있으니 말이다.